길을 걷고, 뛰고, 음식을 먹고, 일을 하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넘어지고, 헛기침을 한다.
그리고 밤이 다시와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잔다.
오늘 하루 어느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쳐다보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관심이 사라졌다 나는 살아있지 않은 것 같다.
백일몽 그 네 번째 꿈...이 플레이어 됩니다.
아무도 모른다 (01:35:22~01:37:56)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따사로움을 넘어 따갑게 내려쬡니다. 엄마가 떠난 흔적은 흘러간 시간만큼 자라났습니다. 엄마가 칠해준 매니큐어는 자라는 손톱 때문에 자꾸 위로 밀어내고, 집 안 일 하느라 닳기까지 했습니다. 깔끔하게 다듬은 머리는 어느 새 더벅머리가 되어버렸고, 날아오는 것은 공공요금 고지서들, 오늘은 전기가 끊길지도 모르고, 내일은 가스가 끊길지도 모르는 버려진 듯한 공간, 버려진 듯한 아이들, 아이들은 무더운 여름공기를 조금은 벅차게 들이 내쉬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것이 왜 이리도 힘든 것일까요
1988년 도쿄에서 벌어진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 엄밀히 말하면 ‘스가모 어린이 유기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실제로는 눈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로 끔찍한 사건이었던 것을 아주 담담하게, 조금은 아름답게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조하듯이 잡아내고 있습니다. ‘언제’라는 기약을 주지 않고 장남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훌쩍 떠나버린 엄마의 부재가 몇 달째 길어지자, ‘살아간다’는 것은 점점 위태로운 상태로 아이들을 위협하게 만들어 버리고 마네요.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소식이 없는 엄마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 혹은 우리가 버려진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커져가면서, 그에 따라 오는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하지만 더 이상 충족할 수 없는 요소들(다 떨어진 엄마가 주었던 돈, 먹을 음식, 생활해야할 전기, 가스 등)은 우려했던 현실로 접어 들어갑니다. 숨이 붙어있기에 살고자 하는데 왜 이리도 그것마저 벅찬 것일까요
4남매 중 막내인 유키가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종이도 없어 가스비 독촉용지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은 이 아이들이 쳐한 고단한 현재 삶과 미래를 암시해줍니다. 형형색색이었던 크레파스는 이제 몇 개 색밖에 없는 몽당크레파스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보라색으로 얼굴의 윤곽을 그리고, 살구색으로 얼굴을 칠하고, 눈, 코, 입을 그려나가지만 이 아이에게 주어진 색은 몇 개 뿐, 유키의 손은 무엇을 고를까 잠시 머뭇거리다가 붉은 입술을 그리지 못하고, 좀 전에 코를 그리고 내려놓았던 보라색을 다시 선택하여 입을 꾹 눌러 그리지요. 크레파스 색을 고르려는 유키의 손 장면은 점점 삶의 선택이 좁아져버린 4남매의 현실인 셈입니다. 그 고사리 같은 손의 머뭇거림이 주는 안타까움이 그 장면을 바라만 봐야하는 우리 자신이 어른이라는 사실이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지요.
태어났음에 마땅히 누려야 할 선택과 꿈들을 이 아이들은 너무 일찍 박탈당한 상태이건만, 어른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방세를 받으러 온 집주인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받아야할 돈을 위해 ‘엄마 어디 가셨니?’라고 아이들에게 물어볼 뿐, 그 이상의 관심을 두질 않습니다. 또한, 생전 유키가 좋아하는 초코렛을 한 무더기로 사가는 장남 아키라에게 편의점 주인은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서 받아야할 돈을 벌기 위해 ‘소풍가나 보구나’라는 말만 할 뿐, 아이들의 표정을 읽지도, 관심 갖고 싶어하지도 않지요.
관심을 보여준다면, 살아가는 동안은 좀 행복하지 않았을까요? 눈길 한 번 주는 것이 그렇게 힘든 사회가 되어버린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