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 Memento, 2000> - 진실에서 멀어지는 기억 (2001/09)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 가이 피어스, 캐리-앤 모스, 조 판톨리아노, 스테판 토볼로스키
발칙한 구성 끊임없이 '존. G'를 찾아내어 복수하고자 하는 삶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주인공 '레너드(가이 피어스 분)'의 처지를 하나의 뫼비우스 띠로 표현하는 듯한 구성으로 이루어진 영화 <메멘토>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며, '기억해야'하는 이야기이다. '단기 기억 손실증'에 걸린 주인공 '레너드'는 10~15분마다 새로운 기억들과 싸워야 하며,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은 새로운 장면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전 장면들을 기억해야 하는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하는 셈이다. 컬러장면과 흑백장면이 교차하면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레너드'의 '타인에게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끊임없이 홀로 추적게임을 할 수밖에 없'는 결코 벗어나지 못할 삶의 굴레라는 큰 울타리의 육중한 무게중심을 향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기억은 윤색되는 것'임을 '레너드'에게나 관객인 나에게도 둔기로 내려치는 듯한 아픔으로 안겨 주게 된다. 현재 내가 기억하는 것들은 나를 대변해줄 수 있는가?
뇌의 해마부분의 손상 이는 단기기억장치로 끊임없이 들어오는 새로운 기억들을 장기기억장치로 제대로 넘기질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레너드'는 '아내가 강간당하고 살해당했다'라는 확고한 믿음상태에서 뇌를 다치게 된다. 그의 장기기억에 있어 아내는 강간당하고 살해당한 상태인 셈이다. '레너드'가 다치기 직전 마지막으로 아내의 깜빡거리는 눈을 기억하는 것은 '죽어가는' 아내의 눈을 기억하는 것이지, '살아나는' 아내의 눈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즉, 객관적으로 보여지는 것들에 대한 기억이 충분히 설명되어지기도 전에 '레너드' 자신의 주관적 해석에 의해 '살아나는' 아내가 아니라 '죽어가는' 아내로 고착된 셈이다.
그에게 아내는 사자(死者)로 각인되었기에 그녀가 살아있다 치더라도 자신의 아내로 받아들이질 못한다. 살아있는 아내는 병에 걸린 '레너드'에게 있어 유령에 가까운 존재로 받아들이거나,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고 느끼든지 혹은 '새미(스테판 토볼로스키 분)'에 대한 기억으로 넘겨버리게 될 뿐이다('새미'의 아내는 2분마다 기억을 잃어가는 '새미'를 실험하기 위해 인슐린 주사 놓기를 시계를 돌려가면서 실시한다. 그러나 그녀는 15분전으로 시계를 돌린다). '죽어가는' 아내에 대한 기억은 범인을 찾아내어 복수하겠다라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를 상기시켜 줄뿐이다.
기억의 윤색 기억은 윤색되어진다. 자신에게 있어 아름다운 기억들은 더욱 아름다운 기억이 되고자 덧붙임과 제거를 반복하면서 원래의 기억을 개칠하고 만다. 꼭 기억하고픈 것들은 그렇게 기존의 기억을 변질시킨 채, 원판으로부터 저만치 달아나게 된다. '새미'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더욱 멋있어 진다는 '테디(조 판톨리아노 분)'가 '레너드'에게 던졌던 말은 '기억이란 끊임없이 윤색을 거듭하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기억은 결코 진실로부터 점점 방향을 잃은 채 멀어짐을 가르쳐주는 인간의 기억에 대해 비꼬는 말인 셈이다. 문제는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라며 기억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질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래서 폴라로이드 사진 밑에 꼭 알아두어야 할 진실들을 짧은 글로 기록하는 '레너드'의 방법의 한계. 또는 기호의 한계이다.
"기표는 기의에 닿지 못하고 끝없이 미끄러진다" 짧은 메모를 통해서 적어둔 기록은 그 기록을 둘러싼 상황에서 벗어나는 순간, '레너드'의 자의적으로 혹은 읽혀지는 그대로 기록도 해석되어지고 만다. 자신이 잠깐 조는 순간, 꼭 기록해두어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기록할 도구가 없어 - '나탈리(캐리-앤 모스 분)'에 의해 기록도구가 강탈 된 상황 - 자신의 병에 떠밀려 새로운 기억들이 도망가는 순간에 '레너드'는 진실의 연결고리를 잃고 만다. 그리고는 동떨어진 기록들을 억지스레 연결시키면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는다.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나쁜 사람이라 기록된 사람은 그 상황에 대한 고찰도 없이 항상 나쁜 사람으로 남겨질 뿐이다.) 기의를 상실한 '레너드'의 기표는 진실을 상실한 채 '과거의 나'를 안고서 떠도는 현실에 불과할 뿐이다.
'레너드'는 극단적인 인간의 표본이다. 기억은 개칠을 거듭하여 숨겨질 부분은 숨겨지고, 덧칠은 견고해져서 다른 색이 끼어 들어갈 틈이 없다. 기록은 기억의 진실을 동반하지 않은 이상 껍데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기억은 절대 진실되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셈이다. 지난날의 기억을 가지고 자신이 정확히 누구인지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인간은 영원히 치유불능의 존재일 뿐이다.
<타인의 취향, The Taste Of Others, Le Gout Des Autres, 1999> -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2001/08) 감독 : 아녜스 자우이 출연 : 장 피에르 바크리, 안 알바로, 알랭 샤바, 아녜스 자우이, 제라르 랑뱅, 크리스티안 미예
"타인은 지옥이다." - 사르트르
'나'라는 존재가 '타인'에게 말한다. 어떤 것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좋아한다고. 그러나 설명을 늘어놓고 있는 자리에서 '타인'이 "난 그거 싫어"라고 말하는 순간에 '나'는 그 강도의 차이를 벗어나 일단 상처를 받고 만다. '나'와 '타인'의 관계라는 것이 이러하다.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 그 관계의 중심요소로 각기 다른 외모만큼이나 다양성을 지니는 각기 다른 취향이라는 것이 놓여져 있다. '나'만의 고유한 취향이 있듯이 비슷할지언정 똑같을 수 없는 '타인'의 취향. 이렇게 '나'의 취향이 '타인'의 취향에게 끊임없이 간섭과 상처를 받고 반대로 타인의 취향을 간섭하고 상처를 주기를 반복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라면, '나'라는 존재가 '타인'에게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느끼게 될 것이다.(심지어 외출하기 전 거울을 보는 '나'의 시선이 동시에 '타인'의 시선이라는 것임을 이해한다면 더욱). 세상에 던져진 '나'는 '타인'과의 부대낌을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음에 구토를 느낄 정도다. 그리고 그 '타인'과의 부대낌은 '나'를 지치게 만든다. '나'와 전혀 같을 수 없는, 설령 비슷하다해도 그 비슷함 가운데에서 발견되는 이질성은 '타인'은 '나'에게 있어 영원히 '가해하는 자'의 역할임을 깨닫게 해 줄 뿐이다. 그러한 '타인'과 어떻게 인사를 하며 지낼 것인가?
영화 <타인의 취향>은 나와 타인의 취향이 충돌하는 순간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어찌 보면, 밋밋하고 지루할 이 영화가 주는 재미는 인물들이 나누는 대사 속에서 취향의 충돌이 안겨주는 여운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충돌 현장에 서 있는 모습들이 바로 '나'에게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그 밀접함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여기 표본집단이 있다.
부인 때문에 자신의 취향조차 억압당하는 중소기업 사장 카스텔라(장 피에르 바크리 분)와 자신의 취향만을 고집하며, 타인의 취향을 전면 부정하는 그의 부인 앙젤리크(크리스티안 미예 분), 카스텔라의 영어선생이자 연극배우인 지적 취향에 사로잡힌 클라라(안 알바로 분), 10년간 300명의 여자와 잤다는 기막힌 계산을 하는 사랑의 방랑자인 보디가드 프랑크(제라르 랑뱅 분), 애인에게 실연 당한 슬픔을 달래고자 플롯으로 같은 음만 반복하는 운전사 브루노(알랭 샤바 분), 그리고 어떠한 취향도 다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듯한 마약거래 상이자 술집 바텐더인 마니(아녜스 자우이 분). 이들은 대화를 통해서 충돌하는 취향이 안겨준 갈등과 오해를 고민을 해대며, 그것들을 이해함으로 풀어내고자 노력한다.
"왜 그 그림을 당신 때문에 일부러 샀다고 생각하지요? 한번이라도 제가 좋아서 샀다고 생각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클라라를 사랑하여 그녀의 취향에 따라 기르던 수염도 자르고, 평소에 읽지 않은 책을 읽어보려 시도해보고(비록 10페이지를 넘기지 못하였지만),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자 영시(英詩)까지 지었다가 그녀에게 실연 당한 카스텔라의 대사는 당연히 '그녀에게 잘 보이고자 그의 취향은 아니지만 단지 그녀의 친구가 그린 그림이었기에 샀을 것이다'라고 믿었던 것에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카스텔라는 그녀의 취향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그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면서 그 동안 아내의 일방적인 취향(온갖 꽃무늬로 가득한)에 가려진 자신의 취향을 발견해낸 것이다. 그리고 클라라는 카스텔라의 진실함을 깨닫고 그의 취향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은 서로의 취향을 넘어서 사랑을 시작하게 된다. 반면, 그러한 카스텔라를 보면서 사람은 좋은데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프랑크는 자유 연애주의자인 마니와 사랑을 하게 되고 마약을 파는 그녀의 취향을 이해하려 하지만, "술과 담배는 합법이지만, 마리화나는 불법"이라는 생각아래 타인의 취향을 받아들이려 하는데는 머뭇거리게 된다. 그리고 여자들은 아무 남자하고 잠을 자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닌 브루노는 외국에 나가있는 자신의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와 잤다는 사실에 고민하다가 여자친구가 자신을 버렸음을 이해하고 영영 헤어지기로 한다.
이처럼 타인의 취향을 이해하는 것이 곧 그 취향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타인의 취향을 이해하는 순간, 그 취향을 접수할 수도 있고, 머뭇거릴 수도 있으며,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 즉, 내가 타인과 소통을 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받아들이기가 아니라 이해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이 주는 의미는 아름답기만 하다. 한음만 계속 플롯 연습하던 부르노가 합주단과 함께 <난 절대 후회하지 않아>를 연주하는 장면은 제각기 소리를 지니면서도 그 소리들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즉 나와 타인의 관계가 주는 아름다움이라고 할까?
안타깝게도 결코 이러한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한 사람도 있다. 자신의 개가 타인을 물어도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자신의 개가 그럴 리가 없다는 말로 일관하는 그래서 전혀 타인과 조화를 이루질 못하는 앙젤리크는 남편과 다툰 뒤 뛰어 다니는 개를 보면서 위선이나 죄를 모르기 때문에 행복한 존재라고 부르노에게 말하다가 한 방 먹게된다. "그럼 디즈니랜드에나 가시죠". 위선과 죄를 안다는 것, 그것이 상대적으로 행복의 가능성을 지님을 그녀는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사르트르의 표현을 뒤집었던 피에르 신부의 말이 떠오른다.
<첫사랑, はつ戀: First Love, 2000> 사랑은 잠들기만 할 뿐... (2001/07) 감독 : 시노하라 데츠호 출연 : 다나카 레나, 사나다 히로유키, 하라다 미에코, 히라타 미치루
모든 사람과 사물과 현상에는 보여지는 것만이 전부인 것은 아니다. 그 표피 속에는 예상치 못한 무언가가 존재하는 법이다.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의 이야기들이 아름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자'가 스스로 그 안에 숨겨진 아픔을 아름다움으로 포장해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 이외의 사람들, 심지어 '사랑 대상자'조차도 그 '사랑하는 자'만의 숨겨진 아픔을 다 가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면에 '사랑하는 자'가 포장해놓은 사랑이야기에는 '사랑 대상자'의 속사정을 자리해줄 길이 없는 법이다.
이처럼 자신에게 관계되어진 자들의 아름답게 표현되어진 이야기들 속에 말못할 슬픔이 숨겨져 있고, 안타깝고 슬프게 느껴지는 이야기 안에도 기쁨과 아름다움이 숨쉬고 있음을 안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물방울 표면을 보면서 그 속을 이루는 여러 성분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듯, 책이나, 영화나, 노래 등으로 부단히 간접 경험하는지도 모른다.
봄방학의 시작, '아이다 사토카(다나카 레나 분)'는 자신을 둘러싼 사랑이 빠져나가는 상실을 경험한다. 하나는 짝사랑의 실연이며, 다른 하나는 병으로 죽음을 향해 가는 엄마(하라다 미에코 분)의 갑작스런 병원 입원이다. 두 개의 사랑이 이 소녀에게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순간, 예상치 못하게 소녀에게 다가오는 것은 엄마의 봉인된 추억이다. 엄마가 고이 간직하던 것을 건네준 고장난 오르골 속에 자신이 살아온 것보다도 더 오래된 엄마의 첫사랑이 사진과 함께 편지 속에 담겨져 있음을 발견한다. 봉인된 추억, 부치지 않은 편지, 소녀 자신이 모르는 기억을 발견하게 된 셈이다. 아직 짝사랑밖에 해보지 못한 소녀에게 사랑의 결과가 이루어졌던, 이루어지지 못하였던 간에 첫사랑이란, 단어 하나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아름다운 환상일 수밖에 없다. 당사자들에게 더 이상 환상은 아닐지라도 17살 소녀 '사토카'에게는 잡지 못하였기에 더욱 안타까운 - 그래서 잡혀진 현실인 아빠(히라타 미치루 분)에게 소홀하게되는 - 사랑인 셈이다.
"우리 이대로 끝나는 건가요? 그 벚꽃나무 아래에서 다시 한번만 만나주세요.."
부치지 못한 편지 한 장과 아름다운 오르골 소리로 다시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 옛 시절 엄마의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은 소녀 '사토카'가 엄마를 통해서 느끼게 되는 첫사랑으로 자리바꿈하고 이는 의미가 변질된 반복행위에 가깝다. 24년 전의 엄마가 부치지 못한 편지의 상대자에게 편지를 전해주고서는 벚꽃나무 아래서의 만남을 이루어보고픈 부푼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미 엄마의 첫사랑인 '후지키 신이치로(사나다 히로유키 분)'는 자신이 꿈꾸던 그러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러하기에 엄마에게 해드리고픈 선물로 '신이치로'와의 만남을 주선하고자 하지만 선물을 그럴싸하게 포장(?)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자신의 환상 속 인물을 만들기 위해 봄방학 내내 '신이치로'와 씨름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소녀는 한 번도 '엄마가 왜 편지를 부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결국, 벚꽃나무 아래에서 만나기로 한 전날 밤, '신이치로'는 '사토카'에게 묻는다. "왜 다시 만나게 하려 하느냐?"고.."왜 엄마가 편지를 부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보았느냐?"고..그리고는 자신의 옛 심정을 고백한다. "그 편지를 받고 싶었다"고..
소녀는 어떠한 대답도 하질 못한다. 왜 그토록 자신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하려 했는지, 기본적인 답도 못하고 만다. 그리고 소녀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두 사람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에 또 다른 무언가가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어쩌면 자신만이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알아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소녀가 사람들의 숨겨진 곳에 대한 이해라는 낯선 여행을 하는 동안, 고장난 오르골 속에 숨겨진 엄마의 옛 추억은 다른 사람들의 잠들었던 사랑을 하나, 둘 깨워 나간다. 아빠는 엄마에 대한 사랑을 다시 일깨우고는 오래 전 깨져버린 커플 잔 하나를 다시 구입하여 짝을 맞추고, 엄마는 가족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자신이 없어도 집안 일을 잘 꾸려나가도록 하나하나 집안 일을 목록으로 작성하며, 자신의 침실에 잠든 딸을 그윽한 미소로 바라보며, "너에게 하고픈 말이 많이 있는데.."라며 말한다. '신이치로'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소녀 '사토카'로부터 자신의 죽었던 딸에 대한 그리움을 발견하고 가족을 그리워하게 되며, 이혼한 후에 멀리 떠나버린 아내를 만나러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이처럼 이루어지지 못하였기에 안타까웠던 첫사랑의 움직임은, 그 순간 잠들어있었던 여러 형태의 사랑을 깨우고는 느끼도록 만들어주었다. 사랑의 변주곡이 연주되어졌다.
모든 것이 끝이라며 첫사랑의 감정을 추스르듯, 종이 접듯이 반씩 접어보니 접혀진 사랑의 감정이 어느 순간, 접으면 접을수록 물리적 방향을 형성하여 다른 이에게 조그마한 면적으로 툭툭 가슴을 치게 됨을, 아직 사랑을 경험 해보지 못한 '사토카'는 알지 못하였다. 그렇게 해서 지금 엄마가 아빠를 선택했음을 말이다. 엄마는 자신이 부치지 못했던 그 편지를 '사토카'가 짝사랑이 아닌 첫사랑을 하게 되면 보여주려 했다고 말한다. 어쩌면 엄마는 딸에게 서로 사랑했음에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이 세상에 존재함을..그리고 그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감정은 결코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잠들고는...잠이 깨면...다시 새로운 사랑을 만들어냄을 말해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친구, Friend, 2001> 삶의 색깔이 비슷했던 녀석 (2001/05) 감독 : 곽경택 출연 : 유오성, 장동건, 서태화, 정운택, 김보경
절대 성장지향주의에 사로잡힌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자의였는지..타의였는지 무시무시한 힘이 지독하게 앞만 보고 달려가도록 이끌어 간다. 꾸준한 고속성장을 목표로 내세우고, 속도전의 승리를 전제로 하는 사회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회에 적합한 획일화된 기준의 잣대를 휘둘러 대면서 적정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을 도태시켜버린다. 다양한 기준을 부여하길 꺼려하는 사회. 나는 승자여야만 하고, 너는 패자여야만 하는 사회. 결코 모두가 승자가 될 수 없는 사회. 이러한 사회가 쌓아올린 업적-속도에 치어 조급하게 쌓아올린 것-들은 언제쯤 그 부실함을 드러낼까? 그 부실함이, 병폐가 치부를 드러내자 그 사회형성의 협조자였던 아버지들은 자신들의 자식을 손수 염을 해야하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아버지가 형성해놓은 사회의 부실함에 깔려죽은 아들. 먼저 이 사회를 등지며 떠나는 아들들. 그 모습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우리 넷 중에..삶의 색깔이 비슷했던 녀석 둘마저도...."
극장구경을 갔다가 휘말려든 패싸움. 똑같은 사건에 대한 결과를 학교측에서는 그곳만의 적절한 평가기준으로 네 명의 친구 중에서 적정수준에 도달한 두 친구-'상택(서태화 분)'과 '중호(정운택 분)'-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처분을 내리고, 나머지 두 친구-'준석(유오성 분)과 '동수(장동건 분)'-에 대해서는 일탈로 규정하고 추방시키고 만다. 추방된 두 친구 '준석'과 '동수'는 삶의 색깔이 비슷한 친구였다. 그들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뛰어넘고 싶은 벽 같은 존재였다. 그들에게 놓여진 벽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어린 시절부터 그들이 스스로 부여한 혹은 세상에서 부여된 과제물이다. 이들의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는 비슷한 듯 하지만, 그 성격을 들여다보면 그 본질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준석'에게 있어 뛰어넘어야 할 벽은 음지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아버지에 의해 자신도 모르게 들어가 있는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탈출하고픈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살아가는 곳이 바다일 수밖에 없는 바다거북이와 같은 존재인 셈이다. 그러한 '준석'이가 같은 삶의 색깔을 지닌 '동수'보다는 공부 잘하고 평범한 가정에서 살아가는 '상택'에게 더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상택'이 자신은 가지지 못한 것을 지닌 존재로 이상향이자, 동경의 대상이 되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결국, '준석'은 자신이 탈출하고팠던 그 벽이 펼쳐놓은 세상에 자신의 몸을 기대고 만다.
그러한 반면, '동수'에게는 마음속 상처를 받아왔던 근원지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한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며 부르짖기만 할뿐인 사회에서 장의사가 직업인 아버지가 자신에게 어릴 적부터 계속 미쳐왔던 영향을 지금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그는 육지든, 물위든, 물 속이든 발붙일 수 있는 '조오련'-사람과 같은 존재였지만, 바다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바다 거북이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장의사가 싫어서 자신이 스스로 택한 반항의 길인 셈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 또 다른 벽을 만들어놓고 말았다. 자신의 눈에 빈약해 보이는 아버지를 대신해 선택한 친구 '준석'은 자신의 아버지, 혹은 형 같은 존재였지만, 그 역시 자신이 뛰어넘어야 할 벽이라고 스스로 느끼기 시작한다. 2인자 콤플렉스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우정은 조금씩 뒤틀려가기 시작한다.
"....삶의 색깔이 비슷했던 녀석 둘 마저도 또 다시 둘로 쪼개지고 말았다..."
오랜 시간을 두고 친하게 지내온 네 명의 친구들은 사회로 뛰쳐나와 각자의 길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어느 여고 축제에 찾아가 여고생 그룹사운드를 같이 바라보는 그들도, 극장을 향해 정신없이 뛰어가던 그들도 될 수 없었다. 한 명은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그저 평범하게, 다른 한 명은 이러한 사회를 발 한 치쯤 벗어나 유학의 길로, 나머지 두 명은 양지가 아닌 음지의 경쟁사회로 적을 두고서는 치열한 경쟁에 자신의 몸을 맡겨놓고 만다. 내가 승자여야 하고, 너는 패자여야 하는 논리에 사로잡힌 채 서로를 대한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행하는 그들의 모습에 우정은 개입될 틈이 없다. 경쟁자로 마주치게 된 그들에게 우정은 협상카드로 변질되고, 우정이 더 이상 둘 사이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아니 시간이 엇갈리게 우정이 찾아왔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결국 협상이 결렬되자, '동수'는 '준석'의 부하에게 칼을 맞고 만다. 살인을 한다는 사실에 겁을 먹어 숨을 거두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무턱대고 찔러대는 '준석'의 부하를 향해 '동수'는 가쁜 숨과 함께 내뱉는다..."많이 묵었다...고마 해라"...스스로 벽을 만들어가면서 쌓아왔던 상처들이 자신에게 여기저기 산재해있음을, 그리고 그 상처들이 아물기도 전에 붕대를 감아버린 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아왔음을 고백하는 듯한, 깊은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동수'의 마지막 고백인 셈이다.
마지막, '동수'를 죽인 죄로 복역중인 '준석'은 '상택'에게 자신의 죄를 인정한 이유를 대답한다. 도망자 생활 속에서도 유령처럼 찾아왔던 우정과 결코 떠날 수 없는 자신이 속한 세계의 논리를 어느 하나 포기하지 않으려는 신중한 언어선택 끝에 내 뱉는다..."쪽 팔려서"
<선물, Last Present, 2001> 잃기 위한 집착을 하는 여자 (2001/04) 감독 : 오기환 출연 : 이영애, 이정재, 권해효, 이무현, 공형진
배낭 하나만을 둘러메고, 그것도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비어있는 배낭 하나만을 둘러메고 여행을 떠나보자. 일상을 살아가는 동안 나를 향해 숨막히게 조여왔던 것들 혹은 겹겹으로 나를 얽어매 왔던 것들을 다 떨구었다는 기분이 들기 전까지 '절대 다시는 일상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을 하고서는 일탈을 향해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을 말이다. 그렇게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자신의 손아귀에서 완전히 놓아버리기 위한 '잃기 위한 집착'이라는 혼자만의 여행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잃기 위해 떠난 여행은 곧 자신에게 주어졌던 것들이 그리워지는 가슴앓이의 순간을 경험하게 한다. '가짐'을 잃고 나서야 다가오는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안타까움. 여행이란 것을 통해 느끼게 되는 묘미는 바로 그러한 것이다. 일상에서 일탈로 향해 나아가면 갈수록 일탈에서 일상을 꿈꾸는 시행착오의 경험. 그런데, 여정을 통해 모든 것들을 다 떨구었다 해도 돌아올 수 없다면, 애당초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자신이 하고 있는 중이라면? 여기 한 여자가 그런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자신의 몸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고, 자신의 영혼은 점점 가던 길을 멈추고 뒤돌아 서서 머물고싶다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다.
영화 <선물>은 고전적인 멜로 드라마이다. 불치의 병으로 죽어 가는 아내 '정연(이영애 분)'과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남편 '용기(이정재 분)'가 벌이는 눈물의 이야기. 아내에게 병이 있음을 알게되는 순간 관객에게 뻔한 결말을 감지시키고는 뒤척거리며 손수건을 미리 준비시키는 최루성 영화이지만, 영화의 끝은 그렇게 많은 눈물의 카타르시스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정연'에게 주어진 죽음은 어느 시인의 시처럼 으레 돌아가야 할 곳으로 가는 편안한 무엇으로 느껴질 뿐이다.
'정연'은 밤늦게 자신이 잠들면 몰래 들어오는 남편 '용기'에게 이혼하자고 요구하고, 남편과 같은 방을 사용하지도 않는다. 정신 못 차리는 남편을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다. 무능한 삼류 개그맨이 직업인 남편을 향해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정말 헤어지기로 작정하고 으르렁거리는 모습이다. 단지, 그렇게 대하는 이유가 무능한 남편과의 삶이 한심스럽고 싫어졌기 때문이었을까? 영화 초반의 이러한 의문들은 그녀에게 예정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감지하는 순간,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다. '정연'은 지금 '잃기 위한 집착'이라는 일탈여행을 하는 중이고, 그 여정은 혼자서 간직하고 앓고있는 아픔처럼 힘들고 쓸쓸하기만 하다.
매일 아침이면 푸석푸석한 얼굴로 아침을 준비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남편이지만, 아침 햇살에 깨어나 스치듯 눈길만 마주치게 되는 남편과의 짧은 만남이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음을 남편은 모르지만, 그녀는 알고 있다. 한쪽은 마지막임을 알고있지만, 다른 한쪽은 마지막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지도 않는 가장 슬픈 이별의 유형에 그들이 놓여진 셈이다.
뒤늦게 그녀의 아픔을 알게된 남편 '용기는 집으로 달려들어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정연' 앞에서 그녀가 지닌 병에 대해 물어보지도 못한다. "왜 자신이 왔는데 내다보지 않느냐"고 말할 뿐이다. 그녀의 죽음으로 가는 여행에 같이 동행을 해주고 싶지만, 아내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던 그가 동행해주기엔 이미 늦어버렸고, 그가 들어갈 틈조차 없음을 안 것이다.
이제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의 여행을 쓸쓸하지 않도록 도와줄 뿐이다. 초등학교 시절의 아내가 짝사랑하던 친구를 찾아주려 애쓰고, 그녀가 고아라고 결혼을 반대하셨던 부모님을 찾아가 뵙고, 틈나는 대로 그녀에게 줄 약들을 자신의 출연료 대신 주었다며 갖다준다. 하지만, 그녀는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자신에 대한 배려에 당혹스러울 뿐이다. 행여나 다른 이들이 자신의 아픔을 눈치채게 될까봐 조심스러워 하고, 정(情)이라는 것이 남을까봐 때로는 짜증을 내면서 또는 화를 내면서 지내왔건만, 자신에게 남편이 던져주는 배려 때문에, 자신이 삶에 미련을 두는 부질없는 마음을 가지게 될까봐 또는 담담하게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까봐 더욱 안타깝게 할뿐이다. 그녀가 행해왔던 '잃기 위한 집착'이라는 여행은 도리어 '가짐'이라는 것이 주는 사랑의 소중함을 얻게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여행에는 일상으로 돌아올 길이 없다.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와 아들을 만나러 저 세상으로 떠나는 순간, 남편은 개그 프로그램에 나가서 방청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용기'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지만, 그 눈물은 웃음으로 비춰질 뿐이다. 마음속으로는 쓰러져 가는 '정연'의 모습을 보며 울고 싶지만 겉으로는 웃음을 선사할 수밖에 없는 현실. '용기'의 개그를 지켜보는 방청객은 그 웃음 속의 슬픔을 모르지만, '용기'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웃음 속에 깊이 숨기어진 슬픔을 안다.
<어둠속의 댄서, Dancer In The Dark, 2000> 뮤지컬은 나의 사랑 (2001/03)
감독 : 라스 폰 트리에 출연 :비요크, 카트린느 드뇌브, 데이비드 모스, 피터 스토메어
답답하리만큼 착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는 고집스레 살아간다. 자신에게 쉴새없이 떨어지는 암울한 현실을 저항 없이 눈 한번 감으며 넘겨버리는 방식을 터득하였으며, 주변이 가하는 폭력에 저항 없이 순응하며 살아간다. 도대체, 그녀는 고통의 끝자락에서 어떠한 빛을, 희망을, 구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일까?
영화 <어둠 속의 댄서>는 <브레이킹 더 웨이브>에서 시작하여 <백치들>을 지나서 도착한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황금 심장" 3부작의 마침표를 찍는 영화이다. 황금 심장이란, 순진한 소녀가 어둡고 위험한 숲을 거치면서 짐승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뜯기어 상처투성이 맨몸으로 숲을 빠져 나오지만 소녀는 이상스럽게도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잘 헤쳐 나왔다"라고 구원받은 것처럼 말하는 현대의 비극을 동화로 바꾸어 놓은 이야기이다. 즉, 이 영화는 동화속 주인공을 잔인한 현실세계로 내려보낸 이야기이다.
그녀의 이름은 '셀마(비요크 분)'. 그녀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뮤지컬이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영화로 보아온 뮤지컬을 사랑한다. 그녀는 뮤지컬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하고, 그녀가 현실에서 벗어나 쉴 수 있는 공간은 뮤지컬의 세계이다. 그녀가 즐겨 보아온 1930대 미국 헐리우드 뮤지컬이라는 영화적 장르는 행복의 복음서이다. 한편의 동화와도 같은 이야기이며, 행복한 결말이 기다린다. 자신의 실수는 남들에게도 너그럽게 이해되며, 주어지는 어떠한 어려움도 쉽게 혹은 기적적으로 해결되는 화해의 장이 항상 열려진 긍정적인 공간이다. 착한 심성의 그녀가 동화 같은 내용의 뮤지컬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그러한 뮤지컬속 세계를 동경하며 자라온 그녀의 심성이 백치에 가깝도록 착한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기에 시력을 회복할 기회를 놓친 그녀가 유전적으로 시력이 악화될 그의 아들을 위해 수술비를 마련하고자(고집스럽게 13세에 수술시키려는 이유는 불필요한 고집이 아니라 수술시기를 놓치면 맹인이 될 수밖에 없는 적기에 대한 집착이다) 무리하게 행하는 야간업무 중에도, 더 이상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이 악화되었음을 인지하는 순간에도, 친절한 이웃이었던 빌(데이비드 모스 분)을 살인한 후에도, 심지어 사형장으로 가는 107걸음의 시작에서도 그녀를 즐겁게 하고, 위로하고, 편안하게 하는 것은 그녀가 상상하는 뮤지컬 세계이다. 그러나 그녀만의 세계는 현실로 표출되지 못한다. 다른 이들은 결코 그녀의 춤과 노래를 보고들을 수 없는 혼자만의 노래, 혼자만의 춤, 혼자만의 뮤지컬이다.
뮤지컬이라는 안식처가 그녀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큰 탓인지 뮤지컬 장르에서 이야기의 전개에서 춤과 노래의 전개로 합리적인 전환을 위해서 단순한 리듬의 반복이 필요하다는 뮤지컬의 법칙이 그녀의 무의식 속에 깊게 자리잡고 있다. 그녀는 주변에 들려오는 리듬에서 멜로디를 구하고, 노래를 하며, 춤을 춘다. 그녀가 뮤지컬을 연습할 때에 드럼 연주자를 원하고, 미칠 정도로 적막한 독방 안에서 소리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녀만의 세계로 가는 진입로가 세상 속을 떠돌아다니는 소리와 소음들, 그 리듬에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결국 소리가 차단된 독방 안에서 힘겹게 빠져드는 그녀의 뮤지컬 세계는 환풍기를 통해 들려오는 소리만큼이나 고요하고 적막하면서 말라비틀어진 건조한 노래와 춤일 뿐이었다. 특히, 그 건조한 노래가 "My favorite Things"라는 것은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뮤지컬세계와 자신의 아들, 이것들을 그녀는 현실로부터 차단 당하고 말았다)
그녀에게 힘든 현실이 닥쳐올 때마다 그녀가 꿈꾸는 뮤지컬 세계가 현실에 대한 도피처였지만, 환상은 결국 깨지기 마련이다. 환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수직 하강하는 가혹한 현실세계의 모습이다. 일급살인으로 사형이 내려진 그녀에게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지고 새로운 변호사를 구하게 되지만, 그 대가가 자신이 바라던 희망을 져버리는 것임을 알게된다. 냉혹한 현실은 그녀에게 기적을 허용하질 않는다. "아들에게 빛을 볼 수 있는 눈을 줄래? 아니면 수술시기를 놓쳐 장님이 되겠지만, 살아있는 어머니를 줄래?" 현실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흥정을 할뿐, 얹어주려는 배려를 제시하기를 꺼린다. 현실은 손해보는 장사를 하질 않는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현실세계가 제시하는 또 다른 불행한 현실로 향하는 덫임을 그녀는 마음깊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사형집행대 위에 올라간 앞 못보는 그녀에게 현실은 검은 두건마저 씌우고자 하고, 어둠 속의 그녀에게 희미하게 스며들 빛조차 가리려는 현실을 향해 그녀는 처음으로 저항을 하게된다. 그렇지만, 무엇이 더 나아지랴. 뮤지컬속 주인공이 되고싶었던 한 여인은 아들의 수술소식을 접한 후,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의 리듬을 듣는다. 자신의 마음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그리고는 그 심장박동 소리에 맞추어 마지막 자신이 사랑했던 아들을 위해 끝나지 않을 노래를 부르게 된다. 처음으로 자신만의 리듬을 가지고 자신만의 멜로디를 이용해서 자신의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 순간 현실은 뮤지컬의 세계가 되었고, 그녀는 뮤지컬의 주인공이 되었다. 제프(피터 스토메어 분)가 그녀와의 마지막 면회에서 수줍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듯, 뮤지컬에 대한 사랑과 그녀가 꿈꿔온 뮤지컬 세계에 깃 든 그 순수함에 대한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의 세계에 자리를 내주려 하질 않는다. 더욱 현실세계를 강조할 뿐.
<번지점프를 하다, Bungee Jumping Of Their Own, 2000> 운명적 만남은 피하고 싶다 (2001/02)
감독 : 김대승 출연 : 이병헌, 이은주, 여현수, 홍수현, 이범수
"처음의 인간은 반음양자(半陰陽者)였으나, 나중에 신은 그들을 두 쪽으로 갈라놓았다. 그 후 이들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서로를 찾아 나선다. 사랑은 우리들 자신의 상실된 반쪽에 대한 동경이다." -플라톤, <향연>
맑은 멜로드라마에 소울메이트(soulmate)와 윤회설을 적절하게 섞어 놓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자신들의 잃어버린 반쪽을 사랑으로 만나게 되는 두 남녀의 이야기다. 일단 모든 것들을 믿어보자.
반복되어지는 자신의 생에 운명적으로 한 번은 만나게 되는 상실된 반쪽과 같은 인연이 있다면, 살아가는 데 있어 알 수 없는 설렘을 느끼게 되는 오직 한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면, 그 인연과 같은 시공간에서 숨쉬어 갈 확률과 눈이 마주칠 정도로 가깝게 마주치게 될 확률, 만남으로 이어져 친해질 확률 그리고 사회의 법칙이 허용하는 범위내의 사랑으로 발전될 확률 등을 가만히 따져 보자니 영화 속의 사랑이야기는 축복 받은 남녀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명적인 만남조차 없이 상실된 반쪽에 대한 동경만으로 생을 마치게 될 것이라는 답이 나오고 세상에 가득 떠도는 사랑에 대한 쓸쓸함을 다루는 이야기들의 출처를 가늠하게 된다. 나와 당신이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시작은 축복 받은 사랑 이야기다.
1983년, 비가 쏟아지는 어느 날 갑자기 인수(이병헌 분)의 허름한 우산 속으로 태희(이은주 분)가 뛰어들어온다. 숨이 멎어버린 듯이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들의 고요한 소요, 들려오는 빗소리만큼이나 두근거리는 설레임 그리고 예감. 그들은 사랑을 예감한다. 하나의 우산아래 비를 피하는 그 순간부터 두 남녀는 이미 하나가 되었고, 점점 서로를 알아가면서 사랑은 커져만 간다. 그러나 신은 그들에 대한 시기하는 마음을 가득 실어 주사위를 던지고 말았다. 입대하는 날, 기차역에서 인수는 태희를 기다리지만 그녀는 영영 오질 않았던 것이다. 남자의 첫사랑은 그렇게 그리움만을 안고 오랜 시간동안 잠들게 된다. 사랑은 그렇게 끝났고 신화는 지속되어진다.
이제 남자는 기억으로만 존재할 뿐인, 그러나 그 기억조차 점차 희미해져만 가서 안타깝기만 할뿐인 첫눈에 알아보았던 사랑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기억에 각인 시키고자 서로서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건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리움은 증폭을 거듭해가지만 기억은 소멸을 향해서 달음박질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잊혀져 가는 부분에는 어느 순간 새로운 사랑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알게 되고, 저 사랑에서 이 사랑으로 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정한 나이가 되자 무언가에 쫓기듯이 결혼을 하게 되고, 어여쁜 딸을 낳고 자신의 인생에 있어 가장 두근거렸던 사랑의 기억은 추억으로 남겨두고는 현재를 사랑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완전하지 못함을 알고 있다. 곁에 누군가가 있어도 또 다른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정말 사랑하는 것일까?"라며 의문을 던져보기도 한다. 서로 반쪽이라며 만나서 하나가 되었건만, 그 모습은 어설퍼 보이기만 하고 틈새를 여기저기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미 사회 속에서 체념이라는 것을 배운 자에게 완전한 사랑은 꿈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지혜롭게도 타협을 적절하게 할 줄 아는 인간인지라 체념이라는 것을 유용하게 사용하면서 현재의 사랑이 주는 허전함을 받아들인다. "사랑은 하면 할 수록 쓸쓸한 것"이라며 스스로 위안을 하게 된다.
그렇게 살아간지 17년, 인수는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한 학급의 담임선생님으로 서있다. 첫사랑에 대해 이야기 해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 알싸한 추억을 빼앗길까 수줍은 미소만으로 첫눈에 반한 사랑이었다고 말하며, 눈만큼은 진실하다는 생각에 학생의 진실을 눈으로 판단하는 존경받는 선생님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신은 인수에게 또 한번 짓궂은 장난을 건다. 현실의 바깥으로 치워놓은 태희에 대한 기억들을 인수의 제자 현빈(여현수)을 통해서 하나씩 끄집어내게 만든 것이다. 한 번의 생에 두 번의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이 믿기 싫은 확률에 갇힌 채, 가슴아픈 기억이 살아있는 인수에게 사랑하고 싶어서 또는 사랑하기 때문에가 아닌 사랑할 수밖에 없어서 사랑하게 되는 운명적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고 말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제일 떠올려지는 것이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신화이야기라면, 뒤늦게 떠올려지는 것은 쉘 실버스타인의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이다.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을 노래하며 힘겹게 굴러다니며 잃어버린 자신의 한쪽을 찾아 나서는 이 빠진 동그라미의 이야기. 완전한 사랑은 잃어버린 반쪽이나 한쪽(혹은 이 빠진 동그라미)에 대한 동경에 머물러 있을 때에 아름다울 것이고, 일상을 살아가는 자에게 살아가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사막을 지나가는데 지쳐버린 자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이 오아시스의 신기루가 되듯이 말이다.
만약 운명적 사랑을 마주치게 된다면, 살짝 비껴 지나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아니 비껴 지나치고 싶다. 결국 잃어버린 한쪽을 찾은 동그라미가 나중에는 한쪽을 포기하듯이 말이다. 그리고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지."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하면서
<포르노그래픽 어페어, A Pornographic Affair, Une Liaison Pornographique, 1999> 사랑이라는 것, (2001/01)
감독 : 프레데릭 폰테인 출연 : 나탈리 베이, 세르지 로페즈, 자크 비알라
"식사하고 있는 장면을 촬영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다. 만약 유람선 위에서 같은 장면을 촬영한다고 가정하면 자유의 폭이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날씨라는 개념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또한 시대극이 된다면.....만약 강아지 한 마리가 고기를 훔쳐 가는 장면을 찍고자 한다면 정말 더 복잡해진다.......이렇게 되면 자유는 극히 작아진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강요에 따라 상상의 세계를 한정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인터뷰 중에서 -
영화 <포르노그래픽 어페어>의 시작은 두 남녀의 개인 인터뷰이다. "그것은 포르노그래픽적인 관계였습니다. 단지, 섹스만을 위해 만났던 것이지요." 그녀(elle-나탈리 베이 분)는 그(lui-세르지 로페즈 분)와의 지난 시절 만남을 그렇게 정의한다. 그(lui)도 그녀(elle)와의 만남을 시종일관 수줍게 회상해낸다. 그 시절의 기억은 그(lui)가 비닐에 보관하여 넣어둔 성인잡지처럼 화석화된 형상으로 남기고 싶지만, 그들의 기억은 각기 다른 형태로 희미하게 추억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만남이 어떻게 시작되었든지 간에, 그래서 그들의 서로 다른 기억의 접점을 어설프게 추정하면서 이야기를 따라가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그들이 만났던 이유는 그녀(elle)의 말처럼 섹스를 위한 만남이었다. 그들이 만나는 공간은 창가에 위치한 어느 까페의 테이블과 붉은 빛이 감싸안은 호텔복도와 관객에게 무한한 섹스환타지에 대한 상상력을 제공하는 푸른빛으로 둘러싸인 밀폐된 호텔 방에 국한되어져 있고, 그들은 그 장소들을 경유하면서 일주일에 한번씩 육체적 관계만을 맺고서는 깔끔하게 다음 주를 기약하는 만남을 가졌던 것이다.
사랑하는 행위의 과정이 일반적으로(그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첫 만남에서 시작하여 커뮤니케이션을 통해서 당사자들이 원하는 기준이 끊임없이 간섭 및 개입되는 과정을 통과하고 그에 따라 증폭되어진 열정에 이끌려 육체적 관계까지 다다르는 선형적 구조로 나열해 볼 때에, 주인공 그(lui)와 그녀(elle)의 만남은 간섭 및 개입의 과정과 그에 따라 분출되는 열정을 뛰어 넘어버린(아니 무시해버린) 상황에서 몸과 몸의 접촉을 먼저 한 것이다. 그 순간에 사랑하는 당사자들의 자기만의 사랑은, 즉 그 사랑의 개별성은 증발되어지고 만다. 각자 다르게 추억하는 만남과 관객 각자에게 다른 상상력을 요구하는 섹스장면은 이미 그 사랑이 지니는 개별성을 드러내었고, 동시에 조건 없는 만남 행위는 사랑하는 대상자 각자에게 지속적으로 간섭할 기준들을 묻어버렸다.
이제 영화가 그녀(elle)와 그(lui)를 통해 보여줄 것은 증발된 바닷물에 남겨진 염분결정체로 사랑하는 행위의 보편적인 개념이면서 본질에 위치한 것이고 그 진실을 보여준다. 절대 자기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지 않는 그들은 계속되는 만남 속에서 자기를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움도 결점도 무의미했던 이들에게 상대방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고, 결점이 눈에 들어오는가 하면, 이내 결점은 아름다움으로 감싸안아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다음주를 기약하며 헤어질 때에는 그녀(elle)는 슬프지도 않음에도 괜히 상실감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고, 그러한 눈물을 바라본 그(lui)는 당혹해하면서 일종의 소외감에 은근히 화를 내기도 하였다. 또한 그(lui)는 다시는 그녀(elle)를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념에 사로잡혀 거리를 방황하기도 한다. 결국 그녀(elle)는 그(lui)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되고, 그들은 함께 살기를 다짐하고 만남을 가지게 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 되고 만다. 그(lui)는 생각하길, 그녀(elle)가 그만 만나자는 말을 하고 싶어하지만 먼저 말을 꺼내기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용기를 내야 한다고 결심한다. 그리고는 이제 그만 만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지금의 좋은 감정조차도 망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elle)는 솔직히 함께 살자고 말하고 싶어했었다. 그것은 두 주인공을 배제시킨 채 오해로 드러나지만, 그녀(elle)는 그(lui)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둘은 마지막 섹스를 나눈다. 그 후에 우연히 그녀(elle)는 그(lui)를 보게 되지만 그저 바라만 본다.
애당초 간섭이 발붙일 곳을 잃어버리자 그(lui)와 그녀(elle)를 둘러싼 모든 곳에 사랑이 숨쉬고 있었음이 보인다. 잠시 스치듯이 마주친 눈길에도, 가벼운 떨림이 있는 손끝에도, 가만히 내뱉는 숨결에도, 걸음에 흔들리는 어깨에도, 상대방을 둘러싼 공기에도, 그 공기의 떨림으로 들려오는 음성에도, 심지어 이별을 하게된 오해의 순간에도, 그냥 멀찌감치 바라보기만 할뿐인 순간에도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완벽한 만족 하에 완벽한 사랑을 꿈꾸면서 때로는 사랑은 없는 것이라 부정도 하며, 이 사랑에서 저 사랑으로 끊임없이 방황하도록 세상에 선고받은 사람들에게 사랑은 있다고, 그것들이 모두 사랑이었다고 영화는 말한다.
다시, 로만 폴란스키의 인터뷰를 기억해보자. 그리고 그의 인터뷰에서 "촬영하기" 대신에 "사랑하기"를 대입해보자. 사랑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얼마나 많은 간섭들의 강요로 인해 사랑하는 것의 공간을 좁혀왔던가. 내 자신이 정해놓은 공간에서 우리는 사랑을 구하고자 하는 바람에, 눈길 닿는 곳곳에 묻어있는 그 많은 사랑을 외면하고, 부정하면서 혹은 숨기우고 살아왔던 것은 아니었던가? 정말 우리는 사랑이란 것을 해왔고, 행하고 있는가?
마지막, 내 아는 이는 이 영화를 두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여 장미 빛으로 변하기 시작한 세상을 깨기 싫다면, 보지 말 것. 사랑의 중반을 지나 이제 그의 아름다움도 결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면, 둘이 함께 보되 조금은 떨어져 앉을 것. 사랑은 끝났으나 아직 그를 보내지 못하였으며, 그것이 가슴을 찢는 고통이라면 절대 보지 말 것. 그러나 이제 담담히 보낼 준비가 되었다 생각된다면, 눈물이 창피하지 않도록 조조나 마지막회를 고를 것. 그리고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사랑이란 것을 알고 싶은 이라면, 놓치지 말고 반드시 볼 것.".....이라고.
그리 폭이 넓지 않은 길에는 주차된 차들과 불난 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길가에 널려져 있으며, 화재발생지역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할 소방차들은 이 어질러진 장애물들에 의해 먼발치에서 속만 애태우며 방관자의 입장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렇지만, 주변의 장삼이사(張三李四)와 같이 불난 것을 구경만 하는 상황에 처한 그들은 더 이상 발만 동동거리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장비를 직접 챙겨들고서는 화재발생지역을 향해서 숨가쁘게 뛰어 나아간다.
화재를 진압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이기에 인파사이를 헤쳐 나아가는 소방관들과 이를 지켜보며 박수를 치고, 그 모습에 환호하는 일반 구경꾼들, 화재가 난 곳에 남겨진 이들의 생사를 안타까워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주위 사람들과 간신히 그 아수라장을 탈출하여 가쁜 숨을 고르는 피해자들, 이러한 지옥현장의 순간들을 사실적으로 강렬하게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연신 카메라 플래쉬를 터뜨리는 기자들 그리고 깨어져 흩어져버린 질서조각들을 추스르고자 애쓰는 경찰들과 불길에서 건져진 사상자들을 쉴 틈 없이 실어 나르는 구급요원들....이처럼 인간의 통제범위를 벗어난 불길의 요란스러움 앞에서 드러나는 군상들-그 모습들이 참으로 다양하게 드러나는 것 같다 싶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일구어진 사회라는 공식에 '재난'이라는 변수를 대입시키는 순간에 으레 발생하는 답이 아니던가.
영화 <리베라 메>는 불이라는 이글거리는 배경화면을 깔고 불을 지르는 방화범을 화면 왼편에, 불을 끄는 소방대원들을 화면 오른편에 아이콘화 시킨 대립구조를 띄고 있다. 이 영화가 선과 악의 대결처럼 보여지는 것은, 불이라는 배경화면 때문일 것이다. 저마다 부여받은 상처와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옳고 그름의 판단을 벗어나서)을 지니고 있는 이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라는 배경화면을 지우는 순간 드러나게 되어진다.
오른편을 살펴보자. 동료 인수(허준호 분)가 자신을 위해 행한 희생 때문에 치유키 힘든 상처를 떠안게 된 소방교 상우(최민수 분)는 영화 내내 그 상처와의 싸움을 불과의 싸움으로 위장하며 자신의 임무를 남들에게 두려움을 줄만큼 철저하게 수행해 나가게 된다.
이러한 그의 개인적인 싸움은 동료들 모두에게 하나의 우울함으로 전염되어지고 새로운 파트너가 된 현태(유지태 분)는 상우를 누구보다 두려워하게 된다. 어쩌면 현태라는 캐릭터는 소방관들이 느끼는 감정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캐릭터가 아닐까? 오랜만의 휴식을 아이들과 못함에 미안해하면서 자신의 직업이 소방관임을 강조하며 화재현장으로 달려가 담담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한무(박상면 분)나, 군말없이 주어진 임무를 묵묵하게 수행하는 도끼(김수로 분)나,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명퇴의 그 날까지 임무를 행하는 인호(이호재 분) 그리고 단지 소방관이라는 것이 폼 나는 직업이라는 생각을 지닌 준성(정준 분) 등에게도 깊이 숨겨진 마음은 두려움일 것이다.
"불 속에서는 죽고 싶지 않다"며 울부짖는 현태의 모습은 그들의 당당한 모습 뒤에 숨겨진 진심이 아닐까? 길을 걸어가다 넘어져 자신의 뱃속에서 오장육부가 다 튀어나오는 최악의 상처를 경험했기 때문에 다시 넘어진다 해도 그러한 경험보다 깊은 상처를 당할까 하면서 스스로 강해지려 한들, 가끔씩 밀려오는 넘어지는 것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숨길 수가 없는 법이다. 이들 모두는 그러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들을 불길 속에서 구하고자 하는 자들이다.
왼편을 살펴보자. 어머니의 부재와 아버지의 지나친 학대 속에서 자라온 희수(차승원 분)는 누나와 불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그 때문에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게 해준 구원자적 역할인 누나와 불이라는 것이 그의 정신세계를 끊임없이 간섭하고 있다.
소년시절에 그는 정신병원에서 지내던 중 자신을 괴롭혔던 아이들을 복수하기 위해 방화를 저질렀고, 이로 인해 실형을 받고 12년 형기를 마치게 된다. 이제 출소한 그는 본격적으로 방화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아버지에 대한 반발은 희수를 아버지의 법칙으로 가득한 사회의 전복을 꿈꾸게 하고, 그 수단으로 어릴 적 자신을 구원시켜주었던 불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머니의 부재에서부터 자신을 구하기 위해 희생했던 자신의 누이에 대한 기억은 그를 결핍으로 몰고 간다. 이러한 결핍을 자신을 치료해주고, 항상 감싸 안아주었던 여의사(정애리 분)에게서 보상받으려 하지만, 그녀 역시 그를 믿기를 거부하고 등지고 만다. 정리해보자면, 그에게 불은 사회 속에서 결핍되어진 자신을 구하려는 수단인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결핍에 대한 보상은(다소 영화 속에서는 어설프지만) 민성(김규리 분)에게로 떠넘겨지는 것 같다. "그만 해"라며 꾸짖는 민성의 절규는 희수에게 어머니의 부재라는 결핍을 조금이나마 보상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보상은 아니다.
이처럼, 영화 <리베라 메>에서 불이라는 것을 빼는 순간 보여지는 것은, 자신을 구하려는 자들의 몸부림이다. 방화범은 결핍되어진 자신을 구하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으며, 화재를 진압하고자 하는 소방관들은 매순간 느끼는 두려움에 빠진 자신을 구하고자 몸부림을 친다. 그리고 나는 몸부림들을 구경을 하고, 환호하며, 박수치고 있는 것이다.
<화양연화, 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2000> 이별이 예정된 자들의 사랑의 몸짓 (2000/11) 감독 : 왕가위 출연 : 양조위, 장만옥
몸이 길을 걸어간다.
꼿꼿이 곧추세운 몸은 어떠한 종류의 흔들림도 외면하면서 하이힐에 무게를 싣고 한 걸음씩 내딛는다. 그 모습에 몸은 도도해 보일 수도 있고, 자신감 넘치는 당당함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렇지 않음을 알게된다. 흔들림 없이 걸어나가는 그 꼿꼿함은 당당함도 도도함도 아닌 경직됨이다. 이기기 힘든 슬픔은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 되고, 그 가슴을 안고 내딛을 발걸음은 몸 전체를 휘청거리게 하겠지만, 발아래 힘을 잔뜩 주어 아무 일 없다는 듯 꼿꼿해지려는 자기경직이다. 그래서 이 지친 영혼이 숨쉬고 있는 몸의 움직임이 더욱 슬퍼 보인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는 지친 영혼들의 슬픈 몸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 느린 템포로 시를 쓰듯이 천천히, 혹은 느리게 흘러가건만 두 주인공의 모습을 보는 동안 바라보는 이들은 그 슬픈 몸짓에 숨이 차 오른다. 비틀거리는 사랑이야기. 왕가위 영화다.
1962년 홍콩, 수 리첸(장만옥 분) 부부와 차우 모완(양조위 분) 부부는 같은 날 아파트에 이사를 온다. 회사의 비서역할을 하면서 상사의 외도까지도 챙겨주는 수 리첸, 그녀의 남편은 외국출장이 잦은 사람이기에 그녀 혼자 보내야할 시간이 많다. 이와는 달리 신문사에서 마감날짜에 시달리고 있는 차우 모완, 그의 부인은 호텔 일로 집을 비우는 일이 잦다. 좁은 아파트 공간에 두 부부가 동시에 이사를 오면서 이삿짐들은 뒤엉키게 되고 이내 사랑도 뒤엉키고 만다. 그녀의 남편과 그의 부인의 불륜관계에서 버림받은 수 리첸과 차우 모완은 사랑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 채 피해자로써 이곳저곳 어두컴컴한 골목길과 계단에서 스쳐가고, 씁쓸한 인사를 나누며 그 시공간을 일정하게 맴돈다.
무언인가를 직감한 이들은 눈물이 쏟아질 듯 한 눈망울로 차우의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내의 거짓말을 애써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무표정하게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느 날 각자의 핸드백과 넥타이를 통해서 그녀의 남편과 그의 부인이 연인임을 확신하게 된 이들은 이제 그 사랑을 따라 해본다."그들은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궁금해하면서.....
둘은 이제 가상의 시나리오를 따라서 배우가 되어본다. "왜 그랬을까?"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식사도 같이하고, 짧은 데이트를 즐기는 등 리허설을 통해서 불륜의 주인공들을 이해해 보면서도 "우리는 그들과는 다르다"고 서로에게 상기시키면서 이 리허설의 결백을 확인해 본다. 그러나 영화는 차우 모완의 부인이 욕실에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이별이 있음을 암시하고는 묻는다. 단순히 흉내내기를 위해 리허설을 하는 이들도 저렇게 서럽게 울까? 결백을 거듭 강조한 만큼, 이들의 이별에 대한 리허설은 거짓울음으로 끝마치게 될 것인가? 리허설 속에 진심 어린 감정이 개입된다면 그들 사이에는 어떤 변수가 생길 것인가?
싱가포르로 떠나야 할 차우 모완은 이별의 리허설을 제의하고, 그 리허설은 쉽게 끝나듯이 보이건만, 끝끝내 수 리첸의 마음은 무너지고 만다.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차우 모완의 어깨에 기대어 흐느끼는 그녀의 모습은 차우 모완의 부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도 지금껏 사랑을 해왔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마음을 내주었음을 이별을 통해서 처음 확인하게 된 것이다. 차우 모완은 함께 갈 것을 제의하지만 수 리첸은 따라가질 않는다. 이제부터 그들은 엇갈림 속에서 세상을 헤매게 된다.
누군가가 제시하는 뻔히 보이는 사랑코스를 장난 삼아 따라간들 변수는 작용한다. 어느 순간 감정을 솔직히 내비치는 자신을 보게 되는가 하면, 상대방의 눈에 빨려들어 두근거리는 자신을 보게 된다. 사랑은 그렇게 또 다른 사랑을 낳는다. 흉내만 낸들 사랑을 낳겠는가 싶었지만,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차우 모완과 수 리첸의 모습처럼 사랑은 감염되어진다.
다만 이 둘의 사랑이 더욱 가슴 아픈 것은 결정된 운명 때문이다. 이별의 리허설까지 각본에 들어갈 만큼 그들의 만남은 결정되어져 있었다. 리허설이라 하지만 그 안에서 서로는 서로를 탐닉했었고, 순간마다 진심을 내비치기도 했으나, 그것은 단지 추억만을 생성하는 과정일 뿐, 미래를 위한 추억 만들기가 아니다. 모든 이들의 운명이 결정된 것이라면, 이별이 예정된 자들의 사랑의 몸짓은 얼마나 서글퍼 보일까?
사랑이 끝난 후 남겨진 추억은 기억으로, 이야기로 회자되어진다. 세상에 많은 사랑이야기가 있는 것은 저마다 사랑에 대해 패배를 맛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 앙코르와트에서 차우 모완은 석벽 구멍에 대고 고해하듯 자신의 비밀을 말하고선 흙으로 구멍을 봉인한다. 그러자 그 순간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은 전설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