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는 쓰레기봉투에 싸매진 채 결국 쓰레기하치장에 버려지고 맙니다. 여기에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감상도 버림을 당하는 아이의 심정도 버리는 사람의 냉정함도 혹은 있을지 모를 인간적인 죄책감도 적을 필요가 없습니다. 검은 쓰레기봉투에 담겨져 버려지는 모습은 성매매에 동원된 아이가 상품 가치가 없어지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필요 없는 물품을 쓰레기봉투에 넣어서 버리듯이 우리가 상품가치를 잃어버린 물건을 버리는 것과 동일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 대상이 ‘인간이 인간을’이라는 점이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인간이 상품화 되었을 때 벌어질 수밖에 없는 지극히 당연한 현실을 ‘설마’라고 외면해 왔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동물을’이라고 했을 때의 현실을 이미 미디어를 통해 보지 않으셨나요?
재일교포 양석일 원작,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영화 ‘어둠의 아이들’은 불편한 영화입니다. 세상은 푸른 하늘과 푸른 들판과 그 위에서 맘껏 뛰노는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면서 자신의 꿈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곳이 아니라고 일침을 놓지요. 그 들판에 올라가지 못하는 아이들, 웃음을 잃어버린 아이들, 뛰어다닐 힘이 없는 아이들, 꿈이 있다면 내일은 자신에게 아무런 일도 발생하지 않기만 바랄 뿐인 아이들. 그 아이들이 당신이 고개를 돌리는 수고를 보인다면 ‘보인다’고 이야기 합니다. 선진국의 지도자가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가지라고 외치는 중에도 그 반대편에서는 아이들에 대한 인권이 어른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는 사실을 제발 당신만이라도 ‘외면하지 말고 보라’고 눈앞에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지요.
널리 알려진 제3세계 아이들의 성매매 외에 이 영화가 충격적으로 다루는 것은 바로 장기밀매입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는 비 선택적 결정은 아이들에게 네 한 몸 바쳐 얼마간 경제적으로 나아질 집안을 이유로 팔려가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집안에 태어난 아이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이식수술이라는 의식에 산 채로 제물이 되기 위해 아이는 마지막 꽃단장을 받고 있네요. 타이주재 일본신문기자는 이 장기매매를 받는 사람이 일본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 사실을 확인하고 기사화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취재하고, 사회복지단체는 이 커넥션에 갇힌 아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뛰어들지만,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사실은 한 아이를 구출해도 누군가가 대신할 터이고, 하나의 조직을 드러내도 또 누군가가 이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견고해진 시스템을 인지하는 것뿐이지요.
우리는 어쩌면 이 아이들을 향해 폭력을 직간접적으로 행하여 왔는지도 모릅니다. 외면만이 스스로를 방어하는 무기라는 사실을 체득하였는지도 모르지요. 쓰레기하치장에 버려진 봉투에서 나와 에이즈에 걸린 몸이기에 더욱 가누기도 힘들었지만 끝끝내 기어서 또 기어서 집까지 찾아갔던 검은 먼지투성이 어린 아이의 살기위한 몸부림을 본다면, 그러나 가족 어느 누구도 맞아주질 않고 그냥 방치당한 채 숨만 내쉬다가 결국에는 숨을 거두고 불구덩이에 몸뚱어리가 타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본다면 우리의 마음은 꿈틀거리지 않을까요. 그래도 부족하다면 이제 누군가의 장기이식수술을 위해 자신은 산 채로 배가 갈리고 장기가 잘려질 거라는 사실도 모른 채 마지막으로 예쁘게 꽃단장을 하고서 차에 실려 자신의 생을 마감하게 될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눈망울을 마주한다 해도 우리의 마음은 외면을 또 내세울까요?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커튼으로 가린다고 비현실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차피 바뀌지 않을 견고한 시스템이기에 포기를 선언하고 다른 세상 일로 치부하는 것은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이에 대한 또 하나의 폭력인 셈입니다. 외면해 온 자신을 거울로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 아이들이 생각하는 우리의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괴물. 손목을 움켜쥔 채 끌고 가는 괴물의 모습.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